영화

장군의 아들 뒷 이야기

밤하늘을 날아서 2011. 4. 18. 16:05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6. 장군의 아들 <상>

 

[중앙일보] 입력 2004.12.19 18:22 / 수정 2004.12.20 09:24

 

1989년 어느날 안성기씨가 아들 돌이라며 영화인 몇 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한담을 즐기고 있는데 배우 박중훈이 슬며시 다가왔다. "사장님, 저 좀 뵙죠"라면서 옆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 역을 맡은 배우 박상민.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며 따라갔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불쑥 바지를 내렸다. 흠칫 놀라 올려다 보니 "여길 한번 만져 보세요"라면서 내 손을 허벅지로 가져가는 거였다. 근육이 잡혀 차돌처럼 단단했다.

"사장님, 저 몸 만들고 있습니다. 김두한 역을 저한테 맡겨주세요." 임권택 감독이 '장군의 아들'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배우야 감독이 결정하지, 내가 무슨 힘이 있나…"라고 말했지만 배역을 따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좋게 보였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탔던 임 감독은 차기작을 고르느라 몹시 고심하고 있었다. '만다라' '길소뜸' '씨받이' 등으로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자 부담을 많이 갖는 듯했다.
 
어느 날 사무실을 찾아왔는데 얼굴이 초췌해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다 병나겠수다. 여유를 가지고 고르시오" 했더니 "그러게 말입니다"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침 내 책상에는 읽다 만 홍성유 원작의 '장군의 아들'이 놓여 있었다. '레이디 경향'의 김화라는 기자가 "재미있다"며 "(영화화를) 한번 검토해 보라"고 놓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처음엔 김두한 이야기에 별 매력을 못 느끼고 있었다. 나는 종로.명동 거리에서 그와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다. 남자답고, 풍운아로서의 면모도 갖췄지만 영화화할 만큼 '우리의 영웅'은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나는 우리 사회 분위기에 매우 실망하고 있었다. 5공 청문회가 한창이던 때였다. 소위 5공 주역들이 줄줄이 국회에 소환돼 80년 5.18 광주항쟁 때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추궁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변명과 발뺌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군인다움은 고사하고 사내로서의 배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또 강남에서 불고 있던 '오렌지족' 바람도 못마땅했다. 남자애들이 꽁지 머리를 땋고 여자처럼 치장하는 꼴을 보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어떻게 된 게 사내다운 사내를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 임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근사한 액션 영화 한 편 나오면 잘 될 것 같은데…."

나는 어느새 임 감독을 '펌프질'하고 있었다. "액션 하면 임권택 말고 누가 있수? 이 책 한번 보시우"하면서 소설 '장군의 아들'을 내밀었다.

"지금 와서 내가 액션이 될까…." 임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뒷날 들으니 당시 임 감독은 액션을 해보라는 내 말에 서운했다고 한다. 이제야 제대로 '자기 영화'를 만들어 볼 기회를 잡아 애쓰고 있는데 '돈벌이 영화'를 만들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소설을 재미있게 봤는지 며칠 뒤 시나리오 작업을 하자고 연락해왔다.

문제는 배우였다. 사실 나는 김두한 역에는 박중훈과 최재성 둘 중 하나를, 하야시 역에는 정보석을 점찍어놓고 있었다. 임 감독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지만 좀처럼 낙점을 못하고 있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7. 장군의 아들 <중>

[중앙일보] 입력 2004.12.20 18:22 / 수정 2004.12.21 09:20

 

1989년 '장군의 아들 1'의 주연 배우를 확정한 뒤 임권택 감독(左)과 김두한 역의 박상민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군의 아들' 1편은 서울에서만 68만명의 관객이 들어 '겨울여자'가 갖고 있던 최고 기록(58만명)을 12년 만에 깼다.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라는 말조차 낯설던 단관(單館) 시절에는 서울에서 20만명만 넘어도 '대박'이었다. 68만명이라는 기록은 단성사 한 곳에서만 6개월간 계속 상영하면서 나온 것이었다. 전국적으론 200만명이 넘었다. 재미있는 건 '겨울여자'도 '장군의 아들'도 모두 신인이 주연을 맡았다는 점이다. '겨울여자'는 장미희의 데뷔작이었다. 다음 기회에 얘기하겠지만 '서편제'도 영화라고는 처음 해보는 오정해를 내세워 '장군의 아들'의 기록을 깨게 된다. 서울에서 113만명이 '서편제'를 관람했다. 흥행사로서의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신인을 기용하면 기성 배우에 비해 위험부담이 크지만 한 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붙는다는 이점이 있다.

배우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던 임 감독이 어느 날 "이 사장, 새 얼굴로 가면 어떻겠소?" 라고 했을 때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좋죠!"라고 받았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을까.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 모두 마음 한구석에 '이번 영화는 신선한 인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신문에 배우 모집 공고를 내자 전국에서 800여명이나 몰렸다. 그런데 딱 한 사람만 빼고는 모두 김두한 역을 하고 싶다고 했다. 태권도.유도.합기도 등 무술로 단련된 이들이 태반이었다. 몸무게도 90㎏ 이상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한 건 우락부락한 무인 타입이 아니라 우수에 찬 곱상한 얼굴이었다.

1차 오디션에서 적합한 연기자를 구하지 못해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서울예전 안병섭(작고) 교수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사진 몇 장을 들고 후줄근한 셔츠 차림으로 회사를 찾아온 게 서울예전 1학년이던 박상민이었다. 2차 오디션 심사를 맡은 배창호, 이명세 감독 등은 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체격이 단단하고 얼굴도 반듯했지만 무엇보다 기억력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뛰어난 배우가 되려면 우선 머리가 좋아야 한다. 감독이 지시하는 말귀도 못 알아듣고 대사 암기 능력도 떨어지는 배우만큼 감독과 제작자의 속을 태우는 것은 없다. 임 감독은 "바로 내가 찾던 얼굴"이라며 그 자리에서 OK를 냈다.
 
'장군의 아들' 촬영 현장을 보면서 나는 새삼 임 감독의 연출 실력에 놀랐다. 역시 '액션영화의 달인'이었다. 액션영화는 대역(스턴트맨)이 많기 때문에 오랜 경험과 편집 감각이 따라주지 않으면 제대로 해낼 수 없다. 그건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다. 20대 중반부터 90여편을 만들어온 임 감독은 관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술 총책임을 맡은 김영모도 일등공신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코트를 휘날리며 180도 돌려차는 것 같은 현란한 장면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무술 실력은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처음 만났을 때 벽을 옆으로 타면서 걷는 걸 보고는 직원에게 뒷조사를 시켰을 정도였다. 워낙 신들린 듯 사뿐사뿐 날아다니기에 마약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마약 근처에 가 본 적도 없었다. 2편(서울 관객 38만명), 3편(서울 18만명)까지 이어진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은 이렇게 탄생했다.

참, 800여명 중 김두한 역을 지망하지 않은 딱 한 사람, 그가 바로 연세대 체육교육과에 다니던 신현준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일본인풍의 외모를 보고 임 감독과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건 하야시 역이다' 라고 찍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8. 장군의 아들 <하>

[중앙일보] 입력 2004.12.21 18:44 / 수정 2004.12.22 08:35

 

'장군의 아들 1' 개봉 때 단성사 앞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임권택 감독, 필자, 김영빈 조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장군의 아들'은 1, 2, 3편을 통틀어 신인 연기자를 80여명이나 기용했다. 1편과 2편 제작 때 각각 44명, 28명을 공모로 뽑았다. 3편에선 전편에 나온 이를 대부분 출연시켰다.

신인을 쓰면 예기치 못한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1편 촬영이 중간쯤 진행됐을 때다. 영화에서 김두한(박상민) 주변에는 늘 3, 4명이 보디가드처럼 따라다닌다. 자연히 이들은 박상민이 등장할 때마다 카메라에 잡힌다. 그런데 어느 날 보디가드 역을 맡은 연기자 중 한 명이 머리를 아주 짧게 깎고 들어왔다. 장면 연결을 염두에 두지 않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가 나오는 장면은 모두 다시 찍어야 할 판이었다. 어처구니 없어 연기자들을 모아놓고 한바탕 호통을 쳤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임 감독은 고심 끝에 고육책을 썼다. 그 친구를 박상민의 두어 발짝 뒤에 서게 해 카메라 초점에서 살짝 벗어나게 한 것이다.

박상민도 골치를 썩인 적이 있다. 촬영 막바지였는데 오전 5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박상민이 얼굴을 다쳤습니다."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당장 불렀다. 눈앞이 노래졌다. 얼굴 한쪽이 거의 망가지다시피 했다. 전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귀가하다 시비가 붙었는데 싸움꾼한테 걸린 모양이었다. 얼굴에 정통으로 발길질을 당한 것이다.

긴급회의가 열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노발대발하며 "너 정신 나갔느냐"며 박상민을 혼냈다. 이번에도 임 감독의 노련함이 빛났다. 콘티에 없던 한 장면을 추가한 것이다. 김두한이 인천에서 상대 패거리에게 맞는 장면은 이래서 들어갔다. 며칠 뒤 기자들이 현장 취재를 왔는데 박상민을 보자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발했다. "야~, 분장 죽인다!"

1990년 6월 9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신작을 개봉하면 나는 보통 오전 6시부터 극장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초조해 집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은 오전 8시쯤 단성사로 향했다. 같은 날 피카디리에는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가, 대한극장에는 안성기, 최진실 주연의 '남부군'이 걸렸다. 그때만 해도 임 감독은 지명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배우나 감독 등 어느 모로 보나 우리가 밀렸다. 게다가 두 영화가 입장료를 3500원에서 4000원으로 올렸다. 나도 덩달아 4000원으로 올리라고 했다. 괜히 싸구려 영화로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 '불리한 여건' 탓에 흥행 걱정을 하며 단성사로 가고 있는데 멀리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시간에 벌써 종묘까지 줄이 늘어서 있었다. 장사진(長蛇陣)이었다. 첫회(조조) 상영이 오전 10시30분인데…. 눈을 의심하며 극장에 갔더니 기분 좋은 아수라장이었다. 유료 입장권이 매진되는 바람에 무료 입장권을 갖고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거센 항의를 하고 있었다. 첫회 무료입장권을 300장 뿌렸는데 매표소 직원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표를 팔았던 것이다. 어찌어찌 소란은 가라앉혔지만 나는 흥분을 누를 수 없었다. 지방은 물론 하와이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1편이 뜻밖의 히트를 하면서 피해를 본 건 '장군의 아들' 조감독이었던 김영빈이었다. 사실 속편은 그가 메가폰을 잡기로 하고 시나리오 작업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 관객들이 다 임 감독을 보고 오는 것 아니겠소? 1편이 좀 됐다고 2편을 조감독한테 맡기면 건방져 보이지 않겠소?" 라며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김 감독에게는 평생 미안한 짓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92년 '김의 전쟁'으로 데뷔한다). 결국 임 감독은 4년8개월간 '장군의 아들' 시리즈에 매달려야 했고, 그 시간만큼 '칸 영화제를 향한 꿈'은 미뤄졌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