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

[스크랩] 5.16은 쿠데타일까,아니면 혁명일까

밤하늘을 날아서 2006. 5. 18. 11:33

어느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생각해볼만한 글이 눈에 보여서 올려보았습니다.

4.19 와 5.16 의 단절성과 연속성

5.16사건 45년째를 맞는다. 5.16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19와의 관계가 규명되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는 흔히 이승만 자유당정부와 4.19를 상호부정(相互否定)의 관계로 보고, 또한 장면 민주당정부와 5.16 박정희정부의 관계를 상호부정의 관계로 보고 있다.

이런 인식의 틀에 따라 민중사학자라는 강만길교수는 4.19를 “민중봉기”이자 “우리 근대사속의 거대한 혁명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주장한다. 김진균교수도 “5.16 쿠데타는 4월 혁명이 제시하는 역사적 과제에 반동적 대결이었다”고 단언한다. 백낙청 교수는 4.19를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이승만 시대의 반역사적 방향을 바로잡으려는 한국 민중의 혁명적 의지가 낳은 사건”이자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인식은 4.19와 5.16의 의미와 성격에 대한 의도적 외면이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4.19와 5.16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선 한국 민주주의가 언제부터 발전했느냐에 대한 시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 혁명’은 반민주주의 시대를 살다가 4.19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이 건국되면서부터 민족사적인 민주주의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민족이 봉건왕정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고 공화국(Republic)을 건설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으며 자유민주적 선거(free election)에 의해 주권 기관인 의회(National Assembly)와 정부를 구성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제1공화국 11년 동안 건국 정부구성 선거를 제외하고도 세 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1952, 1956, 1960)를 더 치러냈고, 의회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한 국회의원 선거는 모두 5번(1948, 1950, 1954, 1958, 1960)이나 있었다. 도의원 선거와 시/읍/면 의원 선거(1952, 1956, 1960)가 계속되었다. 신생독립국이 버텨내기 힘든 복수 정당제하의 자유선거(free election)를 연속 시행해 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으로 상징된 제1공화국은 ‘선거(選擧)’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선거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은 그러한 온전한 민주주의 제도를 성숙하게 지켜내고, 그 많은 선거를 치르기에는 적절한 조건도 기반도 갖춰져 있지 못했던 나라였다. 무엇보다 한국은 이제 민족국가 건설(nation state building)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였다.

무엇보다 경제사회적 여건이 매우 불충분했다. 1955년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농어민 숫자는 71%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두 합하여 9.5%에 불과했다. 절대적 농업사회였던 것이다. 또 일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 당시 65달러($)에 불과했으며, 국민들의 문맹률도 1945년 당시 78%에 달하고 있었다. 국가건설도 완성되지 않는 나라로서 낮은 소득수준을 갖고 문맹률도 높은 절대적 농업사회가 완벽한 민주주의 제도와 반복되는 선거를 다 치러내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은 산업화의 미비로 스스로 설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953~1961년 사이 미국의 원조는 총 국내자본 형성의 약 80%에 달했으며 이는 국민총생산의 8%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스스로 서기도 힘든 원조경제(援助經濟)였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뤄진 한국 민주주의란 결국 조기 성숙(premature)된 민주주의 사회였던 것이다. 다른 모든 사회경제적 수준과 상관없이 민주주의, 그것도 <선거제도>만이 발전했던 것이다. 당시 제기된 사회적 합의이자 국가적 과제의 하나는 “잘 살아 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정부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4.19로 인한 이승만 정부의 교체를 ‘3&#8228;15 부정선거’의 결과로 보는 것은 매우 협소한 시각이다. 그것은 부정선거만 없었다면 국민이 계속 이승만 정부를 지지했을 것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에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4.19는 이승만 정부로터 ‘삶의 질’을 개선시킬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국민적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그것은 민주당의 장면이 등장한 이후 불거져 나온 보다 더 큰 실망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으며 야당의 선거 구호이자, 국민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못 살겠다, 갈아보자”로 잘 상징화되어 있다. 당시 문제의 본질은 “못 살겠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잘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4.19 혁명을 ‘보다 높은 민주주의’라는 차원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는 것은 당시 우리 사회의 기본적 흐름과 사회적 합의의 내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원조중심의 경제가 끝나가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제 불안정과 철저한 ‘민주주의 교육’으로 무장된 신세대의 등장과 맞물리면서 ‘잘 살겠다’는 염원에서 현존 질서를 부정하고 대안을 찾아보자는 것, 그것이 4.19혁명의 본질이었다. 1960년 4월 19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는 제1차적 대안모색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대안세력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검증 과정이었고 그 검증과정을 통해서 대안세력이란 그 누구의 기대에도 충족되지 않는 것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더구나 1961년이면 아직 한국전쟁이 종결된 지 불과 7년 남짓한 기간이어서 전쟁의 상흔이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있었고 공산 전체주의의 생존위협으로 신생 독립국은 여전히 살얼음을 걷는 상태였다. 그러나 대안 중의 하나로 판단되어 몰표로 등장한 민주당 정부는 한 술 더 뜨는 것이었다. 내각제에의 부적응, 민주당의 분당과 분열, 정치지도자들의 계속된 내부 갈등이 곧 ‘민주주의란 이런 것인가?’라는 회의를 낳았을 뿐이었다.

더욱이 분단국의 대치 상황과 한국의 붕괴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북한체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로 4.19를 주도하고 정권을 물러나게 했던 학생들은 이제 ‘통일’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학생운동은 ‘민족통일 전국학생운동연맹’으로 발전되었다. 급기야 민주당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침해당하는 어떤 방식으로도 통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야 했고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강화시키는 개정안을 추진해야 했다. 나아가 4.19를 지원했던 <동아일보> 사설도 “학생다운 순진성을 지녔더라면 차라리 현 질서를 부정하는 공산분자로 자처하고 나서라”고 요구할 수준이었다.

S. 헌팅턴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치제도화 수준이 감당할 수 없는 정치참여의 폭발로 이어진 것이다. 4.19 후 약 1년이 지나서 일어난 5.16은 바로 누적된 국민적 염원이 표출된 사건의 하나였다. 참여폭발과 과잉 민주주의에 따른 모든 혼란과 논쟁을 일시에 잠재우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혼란보다는 안정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과 민주주의보다는 ‘잘사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찾자는 바람의 결과였다. 윤보선 대통령조차도 “한국은 강한 정부를 필요로 하는데 장면은 그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고 5.16을 인정하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부 쿠데타를 기점으로 전환을 맞은 박정희시대에 정권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요구된 것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된 체제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적 자부심을 느낄 만큼 번영된 나라를 만들었으면 하는 염원의 반영이었다. 함석헌은 <5.16을 어떻게 볼까?>(‘61년 7월, 사상계)라는 글에서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라며 4.19와 5.16의 연속적 성격을 표명하였다.

당시 민족적이면서도 민주적 사상을 대변했던 잡지 <사상계>도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었다. 5.16혁명 직후에 나온 <사상계> 6월호에 실린 장준하의 권두언은 “4.19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고 해석했다. 나아가 <사상계>는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선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고 전망하였고 그 전망과 예언은 수십 년이 지난 후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물론 당시 쿠데타의 주역이 조직화된 개혁방안이나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군은 국가안보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계속된 질서부재와 사회 불안정으로는 한국이 맞이한 당면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학생과 달리 군(軍)에게는 조직력과 집행력이 있었다. 군(軍)조직은 냉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장했고, 그 결과 다른 사회경제적 조직이나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발전되고 조직화된 조직이자 기술적으로도 앞선 조직이었다. 군을 중심으로 4.19가 미처 추진할 수 없었던 주체세력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학생중심적 4.19가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조직화된 집행력을 구축함으로써 사회 안정과 번영을 향한 혁신적 기반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5.16의 <혁명공약>도 ‘반공을 제1 국시로 삼겠다는 것’이었고 절망과 기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18년간 계속된 박정희 시대의 안정성과 정당성은 1962년~1967년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산물이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자기 권력의 정당성을 안보와 경제에 두고 있었고, 안보를 튼튼히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면 그것이 바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가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4.19와 5.16은 연속성을 갖는 중요 사건들임이 틀림없다. 물론 단절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단절적 성격보다는 연속적 성격이 더 크다. 단절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열망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계승된 것은 ‘못 살겠다’는 것을 해결해 나가야하겠다는 국민적 과제의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4.19의 의미와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첫발은 4.19가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었음을 파악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1948-1960년간 진행된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어느 신생국가도 가지 못했던 수준의 개인 재산권의 보장과 선거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정착시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961년 5.16으로 시작된 체제는 민주주의보다는 삶의 질 향상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것은 4.19의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산업화를 기반으로 1987년부터 진행된 민주화는 제1, 제2공화국을 이은 제2차 민주화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4.19와 5.16은 단절성과 연속성을 함께 갖는다. 원칙적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과 준수라는 측면에서는 단절적 성격을 갖는 것이고, 안정속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통한 번영국가와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연속성을 갖는다. 5.16은 질서와 번영의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지만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공고화되기 위해서는 제도를 넘어선 토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정립과정이기도 하다. ‘조기 성숙된 민주주의’만으로는 국민의 삶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공유된 인식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대안 모색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이 4.19였고 5.16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19와 5.16은 ‘2단계 연속혁명’이며 세계사적 성공모델로 정착될 만한 성공 혁명이었다.


1111 ( 작성일: 2006-05-17 12:10:34 , IP: 125.xxx.xxx.183 ) 추천 : 8, 반대 : 3




글쎄요... 멀더요원님의 의견은 4.19를 단지 "국민의 삶이 가난하기 때문에" 로 국한 시켜 버리시는 측면이 너무
강한것 같은데요... 물론 어떤 일련의 과정(4.19 의거 등)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빈곤"이라는 단어로 4. 19를 평가하고 그 연속성으로 5.16을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4. 19의 일련의 과정을 보면 먼저 " 2. 28 대구 학생 운동 - 3. 15 부정선거에 따른 마산의거 - 마산의거에서 경찰의 발포에
의해 사망한 김주열님의 사체가 바다에서 떠오름 - 4. 19 의거" 순으로 이어지죠." 그러나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당시의 시위 주체는 "학생" 이었다는 것입니다. 소위 "학생운동"의 시작으로 평가할 수 있는(비록 일제시대 때도 있었지만)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이죠(지금처럼 시민운동이 활발하지 않았고, 일반 국민, 시민의 의식도 그렇게 참여적이지 않았기에...
이것은 현실적 "빈곤"이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당시 학생이 주체가 되어 일으킨 의거는 "자유당 정권의 영구집권에 대한 야욕과 부정선거, 그리고 "오직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과 오만에 의한 독재(이것에 대해서는 박정희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에 대항하는 성격이
더욱 분명합니다. 당시의 구호를 봐도 2. 28 때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마라”에서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 등이었고,
*4. 19의 선언문도 “학생들은 더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만은 없으며 정의와 민주수호를 위해 궐기해야 한다” 였습니다.
즉 이승만 정권의 "실정"도 존재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승만 정권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재와
언론, 국민 탄압, 이승만 정권의 만성적인 부정 부패, 그리고 결정적으로 3. 15 부정선거 입니다"
(물론 여기에 참여한 시민들 중 정치적인 의식,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더 큰 문제를 제기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빈곤의 문제가 "주"가 아니고 이것은 마찮가지로 5. 16과 연결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5. 16은 군 내부적 요인(군의 팽창과 사회적 진출에 대한 욕구, 진급에 대한 문제 등)도 있었지만,
3. 15 부정선거로 인한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실망도 있었을 것 입니다. 게다가 공산주의에 대한
대결구도도 한 요인이 되겠지요 - 국내정세가 혼란한 상황의 문제

5. 16 공약(군사혁명 위원회 조직)
1.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2.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3.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품을 진작시킬 것.
4.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5.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6.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

이것이 5. 16에서의 공약입니다. 하지만 5. 16 쿠데타의 주역인 군인들 자체도 어떤한 명확한 정치의식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단지 "반공의식"이 기저에 있었을 뿐이죠... 이것은 5. 16 이후 군부 내부의 일련의 갈등상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군부내부의 갈등인 "장도영중장 등에 의한 박정희 및 측근 제거 음모사건"이나
민주당 정권기능 회복을 위했던 "선우종원(鮮宇宗源) 한창우(韓昌愚)사건" 민정이양을 위한 "김동복(金東馥)사건" 등을
통해 당시의 갈등 양상을 알수 있습니다.

여하튼 5.16 군사쿠데타는 성공했고, 몇몇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합니다.
박정희는 군정을 마치고 대통령으로 출마해서 당선됩니다.(박정희 46.6%, 윤보선 45.1%)
뭐 득표를 봐도 당시까지는 엄청난 지지를 받지는 않았죠... --;;
여하튼 5. 16과 4. 19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당시 젊은이들의 정권에 대한 부정에의 저항" 이라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것을 어떠한
연속성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4. 19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열망으로 탄생된 의거였기에
5. 16의 성격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5. 16으로 탄생된 정권이
4. 19의 정신을 훼손시켜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그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 입니다. 예를 들어 "5. 18 광주민주화 운동" 때에 희생당한 사람들 중에는 소위
"거지"라고 불리우는 빈곤층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어떠한 "정치의식"을 가지고
시위에 참가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시위의 도중에 어떤 정치의식을 갖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단지 그들은 이러한 시위를 통해 현재 자신의 힘겨운 삶이 변화되기를 바랬던 것이겟죠... 이런 빈곤에
시달리는 생활, 현실을 바꾸고 싶었던 측면이 더 강할 것입니다. 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였던
이들중 일부가 이러한 "경제적인 측면"에 의해 참가하였다 하여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마치
"새마을 운동"의 연장선상 처럼 이해해 버릴 수 있을까요? --;; 당연히 말도안되는 헛소리겠죠...

이렇게 4. 19의거와 5. 16 군사쿠데타의 소위 "연속성"을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5. 16에 의해 탄생된 정권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재와 언론, 국민 탄압, 간접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만연한 부패선거,
오직 나밖에 안된되는 독선과 오만 독재"로 점철된 정권이라면 더욱...

오케바리
( 작성일: 2006-05-17 12:29:33 , IP: 221.xxx.xxx.154 ) 추천 : 0, 반대 : 0




선거철이 다가와서 그런가 정치적인 글들이 요즘 너무 많네요
그중에서도 유난히 박대통령글은 삭재된글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단골 메뉴인데 개소문에서는 이런 정치적인 글들은 안다루었으면 하네요

ㅇㅇ ( 작성일: 2006-05-17 12:42:03 , IP: 61.xxx.xxx.71 ) 추천 : 4, 반대 : 2




박정희의 만주식 식민경제정책이 효과가 있었다고 치자. 일제 강점기의 성장은 뭘로 설명하냐?
글쓴이는 이영훈 같은 애들이 하는소리에 귀기울이는 타입인가 보지.

경제 성장을 위해서 봉건왕조와 흡사한 독재정치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있네. 성장이 목적이라면 독재건 미국지배건 일본의 지배건 상관없겠네.

문제는 수많은 이들의 강요된 희생으로 이뤄진 성장의 성과 마져 패악을 저지른 몇몇 특권층이 독점적으로 향유한다는거지.

518이 629가 민주화 운동이 없었으면 그 도둑넘들이 지들이 가진거 순순히 뱉었을까?
여전히 갈취한 국가 재산으로 떵떵거리면 살고있는 29만원 있다는 대머리를 봐라 간단하잖냐?

419를 무참히 짖이긴 516.. 이게 상식이지.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자기 손으로 인명하던 독재자 권력을 위해 헌법유린 서슴치 않았던 인간하고 419하고 무신 연속성이 있다는건지? 희안하네..

박정희 정권은 일제와 연속성이 강하지. 인적구성 부터 시작해서... 안그래?

ㅉㅉ ( 작성일: 2006-05-17 13:24:53 , IP: 125.xxx.xxx.79 ) 추천 : 2, 반대 : 6




ㅇㅇ씨 그건 아닌거 같네요.
그냥 님 글은 박정희에대한 반대를 위한 글로 밖엔 안 보입니다.
님께서 아무리 박정희에 대한 욕을 하더라도 어차피 현정권이던 지난 정권이던 앞으로 나올 정권이던 결국은 사람들이 박정희 향수를 갖게 하지 않으려면 그만한 업적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박정희는 우리나라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그 날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가장 위대한 왕처럼 치부되어 남아있을거라 봅니다. 님이 좋아하시건 싫어하시건 간에...

우리 역사속의 역대 어느 왕조든 창건 초기에 피바람이 이는 시기가 많았고, 전 개인적으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주주의란 걸 처음 경험하는 시기에 그게(소위 독재라 칭하는, 그리고 당시엔 왕정이라도 아무돈 신경도 쓰지 않았을 절대권력자의 출현) 나쁘냐 좋으냐로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였을 시절에 솔직히 운동권이든 누구던 결국은 박정희가 가진 권력을 탐하던(결국 모두들 대통령 한자리씩 다 하게되지요, 그리고 비리에 연루되고... 결과론적이지만 결국 그들은 그랬습니다) 소위 민주운동가들이 잡혀가건 죽건 나머지 국민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요. 사회적으로 문제다 뭐다 떠들어대니 그게 문제라고 인식하게 된 겁니다. 먹고살기 힘든 상태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지금같이 발전한 사회에서도 경제가 어려우니 당장 노무현씨가 많이 욕을 먹는것 보시면 같은 맥락이라 충분히 이해가실겁니다. 무슨 이상한 지표같은거 들이대지 마시고,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경제를 생각해주세요.

대신 사회가 발전하고 국민 개개인의 교육의 질이 높아지고 그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고 이제 지난 독재에대해 까는건 옳다고 보지만, 당시에 상황을 지금와서 뒤집어 버리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까는건 아니라고 봅니다.

위에 드신 예중에 미국이나 일본의 지배를 받아도 상관없는거 아니냐고 하신 말씀은 참 초딩적 사고방식이란 생각이 들고, 마찬가지로 419와 516의 연결을 직선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저도 생각하지만, 516이 419를 망가뜨렸다는 건 웃깁니다.

당시 정권은 무너졌어야 했고, 어떤 경로든 그것이 쿠데타가 되었건 없어졌어야 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거 인식하신다면, 어줍잖은 비유는 그만두셨으면 하고요.

재평가를 하더라도 가정을 예로들어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건 씨도 안먹힙니다.

그냥 님이 열심히 사시고, 대통령하셔서 박정희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되세요.

그럼 되는겁니다.

역대 대통령 인기투표하면 왜 박정희가 1등인가도 생각해보시고요.

516군사혁명때 길거리 나와서 환호하던 인파와 육영수여사 돌아가셨을때 거리에 운집한 인원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 시해때 울분을 토하던 많은 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아마도 당시에 그 사람을 미워하던 사람들 보다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랬을 겁니다.

그 이유나 곰곰히 생각해보시구요. 세상에 이성으로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게 많이 있지요.

그래서 상대방이 님이 드시는 근거든 뭐든 반박을 못한다고 님이 생각하시는 게 다 옳은게 아닌게 있어요. 좀 더 오래 사시다보면 느끼실겁니다.

충분한 나이가 들었어도 모르신다면 할 말없네요.

-_- ( 작성일: 2006-05-17 13:54:28 , IP: 61.xxx.xxx.3 ) 추천 : 3, 반대 : 0




"역대 대통령 인기투표하면 왜 박정희가 1등인가도 생각해보시고요.

516군사혁명때 길거리 나와서 환호하던 인파와 육영수여사 돌아가셨을때 거리에 운집한 인원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 시해때 울분을 토하던 많은 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아마도 당시에 그 사람을 미워하던 사람들 보다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랬을 겁니다."

이북에서 김일성 죽었을 때도 수많은 이북 사람들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지요-_-;
지금 이북 주민들한테 투표해도 김일성이 1등 먹을 겁니다. 왜 그런지 모르시겠죠? 쯧쯧...

멀더요원
( 작성일: 2006-05-17 16:20:19 , IP: 219.xxx.xxx.251 ) 추천 : 1, 반대 : 1




음.. 난리가 났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한 편이군요.. 요즘, 여권에서 한나라당의 정인봉의원이 5.16혁명 발언에 호떡집에 불난 듯이 껀수 잡았다고 방방 뜨는 모습을 보고 발췌를 해봤습니다. 오케바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선거철이라 특별히 의식해서 올린 글은 아니구요.. 하지만.. 오케바리님 말씀처럼 잡다구리에 정치성글은 되도록 지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짜피 잘 들어오지도 않으니.. 별로 올릴일은 없을 것 같기도 한데요.. 들어오다 보면 꼭 한글사랑님 같이 좌측으로 한 없이 쏠려있는 분들을 보고 열이 좀 받아 정치성 글을 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혁명은 보통 부패나 사회혼란 등의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주로 비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지배층으로 부터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사전적인 의미입니다. 비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권력을 탈취한다는 의미에서 쿠데타와 의미상 비슷하죠.. 하지만 둘의 차이점은 사회적인 모순을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민중의 지지입니다.

5.16은 사회적인 모순을 변화시키려는 의지 때문에 혁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민중의 지지기반이 취약했다는 것에서 쿠데타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쿠데타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려면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쿠데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느날 갑자기 소위 정도 되는 자가 몇명의 부하를 이끌고 대통령궁으로 들어가 대통령을 암살하고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여기에 무슨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던가.. 민중의 지지가 있다라든가 하는 여지는 전혀 없죠.. 그냥 말 그대로 쿠데타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변혁의 의지와 민중의 지지기반에 있어서 5.16은 쿠데타로만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인 변혁요구가 그당시 있었고, 그에 따라 5.16을 함석헌이나 그당시 민주적 사상을 대변했던 <사상계>의 잡지등에서 지지했었다고 보는 겁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말들이라 간단히 말하자면.. 4.19가 비록 김주열의 사체가 떠오르고, 3.15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지만, 본질은 민중들이 혼란스러운 사회의 정돈과 변화를 갈망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4.19이후 혼란스러운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만 갔고.. 그러는 와중에 취약한 경제는 더욱 힘들어져 갔던 것이죠.. 당시, 미국의 원조에만 의지했던 한국의 경제는 미국내에 알지도 못하는 한국의 원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져만 갔던 상황이라 더욱 불안했을 것입니다. 이러는 와중에 혼돈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경제 재건을 혁명공약을 내세웠던 5.16은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록 민중에 의해 아래로부터 위로 일어난 혁명이 아니지만 5.16이 혁명이 될 수 있는 이유이며.. 4.19와의 연속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빠서 더 길게는 못쓰겠네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뵙죠.. 훌륭한 토론 계속하시길 바라며..

1111 ( 작성일: 2006-05-17 16:46:42 , IP: 125.xxx.xxx.183 ) 추천 : 3, 반대 : 0




그리고 멀더요원님 내용을 상당히 왜곡한게 있으신 듯 한데 함석헌이 사상계에 기고한 "5. 16을 어떻게 볼까?"가
5. 16군사 쿠데타를 찬양한 내용이었다고요? 실제로 읽고 그렇게 쓰신겁니까? 아니면 정확한 내용을 알고
쓰신겁니까?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를 예로 드셨는데 그 말은 "꽃"은 피고나서 당연히 시들어 떨어져야 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시작은 잎이였지만 그 끝은 나무이어야 한다" 라고 했죠
즉 군인은 혁명의 주체가 될수 없다는 뜻 입니다. 혁명의 시작은 학생이 했지만 그 주체와 완성은 국민이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의는 아니다. 강아지를 아무리 잘 길러도 그것이 참 사랑은 아니다. 참 사랑은 내가 저를 좋아할 뿐 아니라 저가 또 나를 좋아 하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민중을 동물로 사랑하고 기르고 불쌍히 여겨도 성의는 아니다. 그는 때리면서라도 사람으로 대접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민중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 아니다. 반드시 어느 때 가서는 민중과 어그러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의 본색을 나타내고야 만다. 그리고 오래 속였으면 속였을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는 깊다>

이게 그 발췌문이구요...

멀더요원님 마치 함석헌이 박정희의 5. 16을 찬양한것처럼 사실을 호도, 왜곡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장준하는 그 반공주의적인 성향으로 5. 16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죠... 하지만 이내 실망하고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다가 몇번의 옥고를 치릅니다... 보통 "박정희 라이벌" 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이었죠...)

멀더요원
( 작성일: 2006-05-17 17:22:54 , IP: 219.xxx.xxx.251 ) 추천 : 1, 반대 : 3




1111 님.. 님과 같이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혹여나 있을까봐 들어와 봤는데 어김이 없군요..

함석헌은 물론 군인이 주체가 되는 혁명을 탐탁하게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일단, 님이 왜곡하는 걸 먼저 지적한다면 저는 함석헌이 5.16을 찬양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지라는 말을 하였죠..

함석헌은 5.16을 찬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학생이 주동이 된 4.19혁명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4.19이후에 장난같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시위에 따라 시위의 수준은 점점 낮아지고 급기야는 혼란을 잡기 위해 군대가 일어나고 만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른바 좀더 수준이 낮으며 힘든혁명이죠.

님이 발췌한 부분은 혁명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함석헌의 이상적인 생각부분입니다. 그는 4.19도 잘못된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이 아니라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님이 인용한대로 4.19는 학생으로 시작해서 민중으로 끝났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혼란을 잡기 위해 군인이 일어섰다면 그것은 마지막 혁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글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그는 군인이 혁명이 주체가 된 것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마지막 혁명이 되기를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1111 ( 작성일: 2006-05-17 23:10:44 , IP: 125.xxx.xxx.183 ) 추천 : 1, 반대 : 0




누구도 5. 16이 일단 일어났는데 "다시 일어나야 한다 다시 정부를 무너뜨리자"라고 말하지는 않겠죠...
4. 19 혁명 후의 일련의 혼란 상황을 이미 겪었는데 말이죠...
꼬투리 잡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마치 함석헌이 5. 16 군사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4. 19의거와 동일선상에서 인정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요?

사실 지금 현재도 박정희가 그러한 군부독재체제를 계속하지 않고
2선 정도에서 그쳤다면, 그렇게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장준하 - 박정희를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박정희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라고 까지 말이 나오는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을때 장준하는 광복군 장교였던 것 부터 시작하여 ~~)
, 하지만 그의 당시 반공사상에 의하여 5. 16의 주장을 지지하는 발언과
함석헌을 끌어다가 마치 식자들이 5. 16을 4. 19의거와 동일한 혁명으로 파악하고
적극지지했다는 식으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5. 16 쿠데타로 인한 그 일련의 독재정권까지 정당화하는
식으로 결론짓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라고 생각되서 몇자 적은겁니다..

멀더요원
( 작성일: 2006-05-18 00:31:54 , IP: 219.xxx.xxx.123 ) 추천 : 0, 반대 : 1




"적극적으로 인정" 이라는 표현이 거슬리는 군요.. 그는 혼란을 끝내줄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5.16혁명 이후에는 민중이 다시 주체가 되어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확립되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현실이 그렇지 못하게 되자 그는 3선개헌 반대와 반유신투쟁을 이끈 대표적 재야세력이 됩니다.

님이 박정희정권을 전체적으로 비이성적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글의 촛점은 5.16 당시의 함석헌의 시각과 4.19의 연속성입니다.

그는 지속적인 시위로 오랫만에 일구어낸 4.19 의 결과가 혼란의 와중으로 휩쓸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군인이 등장하여 정돈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혼란이 정리되기를 바랬습니다.

꽃(군인)이나 잎(학생)들은 하지만, 개혁의 주체가 되지는 못하고 개혁 그자체로서 소임을 다하고 떨어져야 하며 줄기(민중)가 주가 되는 개혁이 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4.19 혁명 이후의 혼란을 정돈할 마지막 혁명으로서 5.16을 바라본 것이었고.. 그것은 5.16 이 4.19 와 단절된 혁명이 아니라 4.19에서 부터 시작된 혁명의 마지막 종지부가 되기를 바랬다는 점에서 4.19 와의 연속성을 그가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는 군인이 혁명을 끝내면 다시 민중으로 주체가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댓글의 촛점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함석헌을 일반 의식화된 재야 운동권과는 격이 좀 다른 순수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80년대 들어 독재반대를 외치면서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평화와 인권을 외치며 쇠파이프와 돌맹이 던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운동권들의 폭력시위를 적극 반대하여 재야세력들과 멀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폭력을 끌어내려고 죽창과 쇠파이프로 전경을 두드려 패며 전경들이 방어하다가 시위대의 골통이라도 깨게 되면 피칠과 흙범벅을 만들어 사진을 찍어대고 살인정권으로 기획하는 비열한 세력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박정희는 정도에서 벗어나 결국 민주주의와 다른 길을 걷긴 했지만 대한민국을 훌륭히 발전시켜 세계의 주요국가군으로 합류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경제력이 기반이 되어 수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함으로서 그후 민주주의를 이끌어 갈 수 있게끔한 토대가 된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아직도 갈길이 멀긴 하지만 말이죠..

함석헌의 정도와 박정희의 편법.. 저는 둘다 나름대로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상의 길을 찾아서 행동했던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출처 : 531지방선거
글쓴이 : 이창구 원글보기
메모 :

비록 박정희가 독재자로 변절되었지만 초기의 업적까지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초심을 잃어버린 사람이 박정희 하나 뿐만이 아니므로

단지 왜 우리 나라 역사는 왜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아님 같은 사건이라 할 지라도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비극으로 취급하는 것인지도...